<11>유심조와 상보성 원리

-자연현상은 삶과 죽음처럼 대립의조화-
-창조해 보는게 관측 일체유심조와 같아 -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다 공하다고 사리불에게 설했지만 지혜제일이라 불리운 사리불일지라도 분별지에 바탕을 두고 사물을 인식하는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를 일반화시킨 상보성 원리를 살펴보면 사리불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현대물리학의 바탕이 되는 양자역학의 세계관을 확립한 보어에 의하면 자연은 상보적인 두가지 양(量)으로 기술된다. 상보적인 양이라는 것은 물리적학인 개념으로 입자와 속도와 같은 것인데 동시에 측정할 수 없는 두가지 물리량(物理量)을 말한다. 한가지 물리량으로 기술되는 자연현상은 결코 없다. 자연현상, 적어도 물리량으로 기술하는 현상은 그것이 무슨 현상이든 반드시 상보적인 두가지 양을 써서 기술한다.

상보적인 양은 물리적인 양을 말하지만 물리학을 떠나서 이해할 수도 있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음·양의 개념으로 이해해도 좋다. 실제로 보어는 상보적인 양을 음·양의 개념으로 보았다. 삶과 죽음,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 선과 악이 모두 상보적인 것이며 심지어는 유(有)와 무(無)도 상보적인 것이다. 일상적인 경험이나 단순논리로 보자면 이들은 모두 대립되고 모순되는 개념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입자-파동의 이중성에서 보듯이 자연은 이중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물리현상에 국한시킨다면 이 이중성이 바로 상보적인 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물리현상은 상보적인 양으로 기술된다. 물론 상보적인 양이 아닌 물리량도 있지만 그러한 물리량은 기본적인 물리량이 아니고 다른 기본적인 상보적 물리량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중성을 나타내는 물리량을 보어가 상보적인 양이라고 부른데에는 이유가 있다. 관찰하는 자가 대립과 모순으로 파악하든 말든 자연은 서로 상보적인 두가지 양의 조화로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서로 보완해 준다는 뜻을 가진 상보적인 양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바로 음·양의 조화로 자연이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상보적인 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볼때 상보적이라는 말은 참으로 적절하게 붙인 이름이다. 상보적인 양이 있기에 변화하는 자연현상을 물리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전 물리학적으로 기술하는 고전역학이든 현대물리학의 양자역학이든 자연현상의 변화를 기술하는 역학(力學)은 상보적인 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쉬운예를 들자면 입자의 위치나 속도중 하나만으로는 입자의 운동을 기술할 수 없고 위치와 속도를 나타내는 두가지 양이 있어야 입자 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다는 뜻이다. 꼭 두가지 양이 있어야 물리학적 기술이 가 능한 자연현상이지만 하나의 자연현상에 대해 상보적인 양 두가지를 함께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상보성원리이다. 상보적인 양은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는 양 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관으로 관측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인간의 분별지(分別智)로써는 그렇다. 따라서 두가지 양 모두에 적당한 불확정성(不確定性)을 두고 관 측하거나 어느 한가지 양을 철저히 무시하고 나머지 한가지 양만을 확실하게 관측 할 수 밖에 없다. 어느 것을 어떻게 관측하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관측자의 선택 에 맡겨진 것이며 관측자가 선택하여 자연을 본다고 해도 자기가 보고싶은 것을 창조하여 본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관측한 것을 다른 사람이 관측하였더라면 다 른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식으로 창조했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는 이렇게 관측을 통하여 창조된 것만을 물리적 실체라고 한다. 이 물 리적 실체는 눈앞에 드러난 자연이라는 뜻에서 불교의 색(色)과 유사한 개념이라 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측이전의 것은 무엇이라고 이름조차 붙이지 않는다. 그저 여러가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여러가지 상태가 뒤섞여 있는 것으로 묘사할 뿐 이다. 물리학적 이름조차없는 것에서 창조하여 보는 것이라면 바로 일체즉 유심조 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199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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