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모든 것의 근원

물리적 진공에서 우주 나왔듯이
마음의 진공에서 ‘我 ’ ‘수상행식’생겨

물리학은 ‘색(色)’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이기에 눈에 보이는 ‘색’과 ‘물리적 진공’과의 관계를 밝히므로서 반야심경의 내용을 물리적인 측면에서 뒷바침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공’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이것만으로는 미흡한데가 있다. 경전의 첫머리에서 말하기를 반야로 비추어 볼 때 ‘오온이 개공’이라 하였으니 깨닫기 전에는 ‘공’을 관해 아무리 분별지로 이해 한다고 하더라도 ‘공’을 체득할 수 없겠지만 ‘공’을 이해한다는 것은 길을 걷는 사람이 지도(地圖)를 갖고 있는 것만큼 ‘공’을 깨닫는데 도움은 될 것이다. 적어도 잘못된 길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연구대상이 아닐지라도 ‘물리적 진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아’에 관해 계속 접근해 보기로 하자. ‘아’도 어떤 기하학적 구조를 갖고 있음은 지난번에 설명했지만 이번엔 ‘아’의 바탕이 되는 마음 구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마음은 의식(意識)과 무의식(無意識)의 이중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보고 듣고 느끼는 ‘의식’과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지만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끊임없이 간여하는 ‘무의식’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6식을 뜻하고 무의식은 제7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불교에서 말하는 제8식과 그것을 넘어선 일체 마음을 모두 포함하여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기로 하자.

사람의 의식구조는 컴퓨터와 너무나 흡사하다. 사람은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판단한 것에 따라 자신의 뜻을 결정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 그렇지 않다. 과거의 경험과 주위환경및 받은 교육에 의해 의식구조가 거의 결정된다. 마치 컴퓨터가 미리 입력된 명령체계에 따라 일체의 작업을 수행하듯이 사람도 무의식에 기록된 기억을 바탕으로 판단과 행동을 하게된다.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인격과 습성을 지니게 된다. 버터와 치즈에 맛들린 사람과 된장과 김치에 맛들린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다르기 마련이다. 컴퓨터에 입력된 정보가 다르면 다른 답을 주듯이 무의식에 깔린 정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하도록 선한 사람은 선한 행동을 하도록 환경과 교육에 의해 무의식속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환경에서 자랐어도 타고난 유전형질에 따라 성격과 행동이 다를 수 있지만 그것도 DNA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컴퓨터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사람은 정밀한 컴퓨터에 불과할까? 유전자와 무의식에 기록된 정보가 다르면 다르게 행동한다는 점에서 사람도 컴퓨터와 마찬가지임에 틀림이 없다.
한 사람에게서 그가 받은 교육의 내용을 하나씩 지워나가면 어떻게 될까? 의식과 무의식속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지워진다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마치 일정한 공간에서 물질을 다 없애면 물리적 진공이 남듯이 사람에게서도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면 정신적 진공이 남지 않을까? ‘아’가 기억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뜻에서 ‘아’는 실체가 아니다. 그런 뜻으로 불교에서는 ‘아공’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것을 벗어던진 이 ‘아’는 허무한 존재가 아니다. 일체의 욕망, 환경과 교육및 경험에 의해 물들어진 것을 벗어난 ‘아’는 물리적 진공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벗어난다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구별도 없이 글자 그대로 마음이 비었다는 뜻이다. 텅비었으니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눌 것도 없다. 마음이 비었다는 것은 ‘빈 마음’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도 없다는 뜻이다.

시공간도 없고 물질도 없는 ‘물리적 진공’에서 우주가 나왔듯이 마음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는 ‘마음의 진공’에서 ‘아’가 나와서 마음과 수상행식이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도 마음도 없다면 그것을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주’와 ‘아’의 근본은 분별지로 헤아릴 때는 아무것도 없는 ‘공’인 것이다. 적어도 반야심경이 말하는 ‘공’은 그러한 뜻이다.

1996-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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