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아제아제 바라아제

“가자 더높이 영원한 깨달음의 길로”
진리의 세계 이르는 실천적 주문

경전은 설하기를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비한 주문으로서 일체의 고(苦)를 제거하며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고 한 후 바로 주문을 설하여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 사바하’라고 가르친다. 주문의 뜻은 ‘가자 가자 더 높이가자 영원한 깨달음의 길로’이다. 경전은 색즉시공으로부터 시작하여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를 설한 후 그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영원한 깨달음의 길이 있음을 믿고 그 길로 나가겠다는 의지를 마음에 심는 것,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길로 떠나는 첫 걸음이라는 뜻이다.

현대물리학에서 기술하는 물리적 상태와 사람의 심리상태는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다. 물리적 상태를 현대물리학에서는 상태함수로 표현하는데 이 상태함수는 갖가지 상태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기술한다. 이미 설명한대로 이 가능성중에서 어느 한가지만을 나타나게 하는 것은 사람이 그 상태를 골라서 보았기 때문이다. 쉬뢰딩거의 고양이에서 설명한대로 관찰하기 전까지 고양이의 상태는 삶과 죽음이 섞여 있는 것으로 기술된다. 살아있는 고양이를 본다는 것은 삶을 창조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도 물리적 상태와 닮았다. 무엇을 결정하고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모든 가능성이 뒤섞여 있다.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다. 부처를 생각하고 불도의 길을 갈 수도 있고 마를 생각하고 마사(魔事)를 지을 수도 있다. 불도 마도 다 마음을 쓰기에 달린 것이다. 마음은 물질과 달라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어 잡을 수 없는 것 같지만 물질을 다듬어 모양을 만들듯이 마음을 다듬어 길들일 수가 있다. 마음을 길들이는 좋은 방법이 마음에다 말로써 암시(暗示)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염불독경을 하며 반야심경에서는 신비한 주문 ‘아제아제 … 사바하’를 즉 ‘… 저 영원한 깨달음에의 길로’라는 말을 불자의 마음에 심어주는 것이다. 염불이나 주문을 염하는 것은 다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도 버리고 조사도 버리고 일체의 것에 매달리지 않는 무애를 얘기한다.
일체의 계율마저 사람의 마음을 묶어두는 장애로 취급하여 계율마저 뛰어넘는 무애자재행을 얘기한다.
궁극적으로는 그래야 한다. 삶도 죽음도 옳고 그른 것도 뛰어넘는 ‘공’에 이른 마음이라면 거기에 무슨 부처라거나 마라거나 하는 구별이 있겠는가. 그 마음에 무슨 계율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무애자재한 마음에 이른 다음에라야 부처를 버리고 계율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무애자재한 마음에 이르기 전 즉 ‘조견오온 개공’을 하기 전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 계율도 지켜야 한다. 반야심경의 가치는 바로 주문을 설한데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공’이고 근심 걱정도 다 집착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헛것일지라도 거기에 매달려 울고 웃는 범부에게 깨달음을 설해봤자 그것을 얻을 방법이 없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길에 이르기 위해 믿음과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문이 가리키는 것이다. 헛된 믿음이 안되도록 경전은 먼저 이치를 설하고 그 이치를 체득하기 위해 마음 속에 먼저 ‘… 영원한 깨달음의 길’이 있음을 믿는 마음이 있어야함을 설한 것이다.

물리적 상태는 관찰을 행하기 전까지는 무엇이 결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여러번 말했다.
그러나 한번 무엇인가가 결정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결정된 것만 나타난다. 마음도 그렇다. 한번 결정되면 그길로 움직인다. 이렇게 결정된 마음이 바로 업식이다. 우리에겐 두터운 업식이 있어 진리를 가리우고 있다. 깨달음이란 바로 이 업식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헛된 믿음’이요 집착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경전은 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헛된 꿈에서 깨는 방법이 신비한 주문 ‘… 영원한 깨달음의 길’에 있음을 설한 것이다. 물론 신비한 주문도 새로운 업식을 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은 후에나 벗어날 것이지 범부에겐 꼭 필요한 것이다.

1996-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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