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마치는글

물리학적 ‘심경’ 접근 경전이해 도와
‘반야의 세계’ 이해차원 넘어 ‘믿음’중요

반야심경은 부처의 차원에서 본 진리를 설한 것이다. 반면에 물리학은 오관으로 인식하고 분별지로 판단하는 보통사람들이 물질계를 탐구하여 이룩한 학문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물리학으로 경전이 말하는 세계를 설한다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의 입장에서 경전이 말하는 내용을 살펴볼 필요는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각도에서 심경의 내용을 물리학적 입장에서 접근할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수학과 물리학을 통하여 우리는 분별지의 한계에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한계에 접한 후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거나 없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믿음의 문제에 속하므로 말로써 논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시도한 글이 지금까지 말해온 ‘반야심경의 물리학적 해석’인데 졸열하여 경전의 내용을 훼손치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하나의 예로 윤회의 문제를 들 수가 있다. 이글의 첫회에서 ‘사람과 돼지는 같은 것인가’하는 물음을 던졌는데 글을 마치면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모색해 보기로 하자. 같은 것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연필을 예로 들겠다. 책상위에 놓여있는 연필과 이 연필이 학생의 손안에 들려 글을 쓰고 있을때 두 연필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다르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다르지만 이것을 책상위에 놓으면 저것이요 저것을 들면 이것이다. 즉 저것이 변하여 이것이 되는 과정을 다 살펴서 알 수 있으면 저것과 이것이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 변하는 과정을 모를 때 우리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고 한다. 변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더 합쳐지거나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는 불생불멸의 원리에 의해 생긴것도 없고 없어진 것도 없다. <미란다왕문경>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한 방화범이 작은 불씨를 가져와 어느집의 지붕위에 불을 질렀다. 이 불씨가 자라나 마을을 다 태운 후 방화범이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 방화범은 무죄를 주장한다. 자기가 가져온 것은 작은 불씨이고 마을을 태운 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불씨가 자라나서 즉 변하여 마을을 태운 불이 된 것이니 이 사람이 범인이라는 판결을 경전은 내리고 있다. 옳은 판결이다. 물리학에서도 이 판결과 같은 방식으로 ‘같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으로 판별한다.

물질의 기본을 이루는 소립자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고 소립자가 다른 소립자와 힘을 주고 받는 기본 상호작용이 네가지가 있지만 물리학자들은 한가지 종류의 소립자가 여러가지 상태로 나타난 것이 사람의 인식능력에 따라 여러가지 소립자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자들은 네가지 기본상호작용도 한가지가 여러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물리학자들의 이런 생각은 완전히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확인되었고 물리학의 목표란 진공에서 나온 한가지 종류의 소립자와 반입자가 삼라만상을 이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돼지와 사람이 같다고 말할 수 없지만 사람이 변하여 온갖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리고 원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윤회란 항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물리학과 반야심경은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기에 물리학적으로 경전의 내용을 증명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물질세계만 본다면 물리학이 경전의 내용을 뒷바침 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진공이 물질에 영향을 미치고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 소멸하며 진공에서 우주가 탄생할 수 있다면 이것을 가리켜 색즉시공이라고 말할 수 없겠는가? 이것을 이해한다면 남은 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믿는다면 신비한 주문을 깊이 새겨담는 것 뿐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 사바하.

 

199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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